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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후피임약(노레보정)의 일반의약품전환 논쟁
작성자 성폭력상담소 작성일 2012/01/10 조회수 1843

-사후응급피임약 일반의약품 전환 논쟁을 보며-

● 꼬깜(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일 년 전인가. 독립적이고 까칠한 둘째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하는 활동을 오지랖이고 비현실적이며 이상만 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아주 현실적이고 급한 목소리로.

“언니, 사후피임약 말야.… 그거 어디서 사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별 무리 없이 모범생으로 순탄한 길을 걸었던 동생은 TV 속이나 주변 여자들의 의도치 않은 임신과 같은 인생의 급작스런 변화를 한심해 했다. 준비 못한 섹스, 계획 하지 않은 삶을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하고 단선적인 사고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뭘 그것까지 생각해야 하나, 뭐 그런 식이었다. 그런 동생에게 온 전화였다.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 그 친구가 조금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떠한 사족도 붙이지 않고, ‘나는 너를 비난할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다. 너도, 나도 그럴 수 있다’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한껏 넣어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사후응급피임약은 성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하며, 병원 처방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과하게 비난하거나 쪼그라들지 말아야 하고, 남자친구에게 너의 복잡하고 두려운 감정을 설명하고 공유해야 하며, 꼭 같이 병원에 가고, 이번 계기로 이후에 남자친구와 피임 실천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갖는 기회로 삼아라 등등. 왠지 그나마 있는 전문성을 과하게 어필하고 싶었던 맘도 있었나보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인터넷 찾아가며, 상담소 활동가들에게 물어가며 일도 팽개치고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 7월, 사후응급피임약의 의약품 전환 논쟁이 있었다. 보건복지부 산하인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는 17개의 약품을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에서 약국 판매로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의 전환 논의 중에 있었는데 이 약품 중 사후응급피임약인 ‘노레보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병원을 방문하여 의사 처방을 받아야 구매가 가능한 노레보정을 약국 구매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약국 판매와 관련되어서 보건복지부 담당자와의 통화 내용에서 “종교계와 의사계 반대가 극심해서 사실 전환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답변했다. 결국 보건복지부는 사후응급피임약과 관련해서는 윤리적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며 결정을 보류시켰다.

한국천주교회 등 종교계에서는 응급피임약은 성문란을 조장하고 낙태약이기 때문에 생명을 지키려는 교회로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일부 의사계에서는 사후응급피임약을 허용하면 사전 피임을 안 해 낙태율이 높아질 것이고 과다 복용에 의한 부작용과 오남용의 문제, 판매량이 몇 십 배 증가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언뜻 들어보면 그럴싸하다. 1분만 더 생각하면 꽤 황당한 논리이다.

사후응급피임약이 약국 시판된다고 성관계가 많아질 것이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응급피임약의 부작용을 알 수 있는데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다고, “와 이제 섹스를 하자. 응급피임약이 약국에서 파니까 오늘 만나!”라고 환호할 꺼라고? 성관계가 많아진다는 상상력도 참 저열하지만(타인의 섹스에 뭔 관심이 그렇게 많은지.) 실제 성관계가 많아져서 문제될 건 뭐있나. 낙태가 많아질 것이라고? 사후피임약의 접근성이 높아져야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들지 않겠나. 오남용, 부작용이 많아질 거라고? 오남용의 문제는 의약품 자체가 내재하는 속성이다. 어떤 의약품이든 판매와 오남용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여성들에게 직접 끼칠 부작용 등 건강 차원의 문제나 남성의 피임 전가로 오남용하지 않을 수 있는지, 정부 차원의 홍보와 교육을 고민하고 지원하라는 것이다.

서구 사례처럼 판매량이 몇 십 배 증가할 것이다? 당연하다. 병원 판매로 그동안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반증이다. 판매 초기에 접근성이 높아졌는데 구매율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닌가. 그동안 응급피임약을 병원에서 판매했기 때문에 휴일, 연휴에는 구매가 어려워 ‘응급’이라는 약의 기본 속성을 방해했으니 접근성을 높이는 게 맞지 않은가. 어차피 병원 처방 받는다고 따로 뭔 검사를 한다거나 부작용을 설명해준다거나 따로 진찰해주는 거 아니다. 그냥 가면 준다. 수치심이나 심정적 거리감 때문에 병원 방문을 주저하는 여성들의 정서적 접근성을, 약의 실효성을 높이라는 얘기에 왜 이리 반대 논리가 거창한가. 성문란? 생명경시? 성도덕 추락? 참으로 고결한 분들 나셨다.

또한 이런 격정적인 주장 속에는 빠진 이야기가 있다. 정작 이 약을 복용해야 할 여성들의 목소리다. 실제 여성들이 언제 어떻게 왜 사후응급피임약을 복용하게 되는지 말이다. 누가 두려움에 떨면서 임신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 부작용을 감내하면서 복용하고 싶겠나. 피임 실천 과정에서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는 얘기를 그러니까 “사후응급피임약 접근성 높이면 안된다”는 주장으로, 다른 영역의 문제를 헷갈리게 휘젓는 이들은 누구인가. 경제적 이해관계와 가부장제,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여성억압을 위해 열심히 목소리 내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 때, 나는 불투명한 미래와 태도를 경멸하는 동생의 작아진 목소리에 어떻게 대꾸해야 했을까.

‘왜 피임을 못했니, 너 설마 벌써 성관계를 하니, 결혼도 안했으면서 순결의식이 엉망이구나, 부모님이랑 사는데 어디서 한거니, 그 때 밤샌 날 엠티가 아니었구나, 어머 너 성적 문란이 과하구나. 낙태가능성도 있는데 생명을 경시하는 무책임한 인간아…’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종국에 퍼붓고 싶은 비난은 무엇인가.

‘너, 결혼도 안한, 여자가, 성관계를, 한다는 얘기니?’

노레보정의 일반의약품 전환의 논쟁 속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성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성문란이란 말로 함축된 화살촉이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사회는 여성이 성적 주체가 되는 것, 그게 두려운 거다. 비난하고 싶어서 안달나지 않았나. 그 말이 하고 싶어 돌고 도는 거 아닌가.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반성폭력> 3호에 실렸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토론회, '신가족주의사회, 전업주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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